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일랜드 자유국 (문단 편집) === 자치 운동 === 아일랜드 섬은 1801년부터 영국의 정식 영토였지만,[* 그 전에도 아일랜드 왕을 잉글랜드 왕 혹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의 연합 왕국)의 왕이 겸하여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다.] 영국의 아일랜드에 대한 취급은 [[식민지]]와 별 다를 바 없었다. 영국은 [[아일랜드인]]을 차별했고, 특히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대표되는 영국이 아일랜드에 저지른 대실책으로 영국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적개심이 강해져 아일랜드 민족 감정을 자극했다. 그래도 아일랜드는 영국 본토인 만큼 브리튼 섬처럼 지역에서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아일랜드인들의 여론이 중앙 정치계에 제기될 수 있었다. 이렇게 아일랜드인들의 의사가 중앙 정치계에 전달되자 [[영국 자유당]]을 중심으로 19세기 중반부터 아일랜드에 자치를 허용하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웨일스]]처럼 현지에서 [[양원제]] 의회를 구성하고 아일랜드에 관련된 입법 권한의 많은 부분을 [[영국 의회|영국 중앙 정부 의회]]에서 새로 생길 아일랜드 자치 의회에 넘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 본토에서는 [[영국 보수당]]을 중심으로 이 방안에 대해 연합 왕국을 해체할 것이라며 격렬한 반발이 일었고, 아일랜드 내에서도 [[가톨릭]]이 대다수인 아일랜드 대부분의 지역과는 다르게 신교도가 주류였던 [[얼스터]] 지역은 자치 방안에 대해 결사 반대했다. 결국 자치 논의는 더 진전되지 못했다. 1910년대에는 총선에서 [[보수당(영국)|보수당]]과 [[영국 자유당|자유당]]이 [[영국 하원|하원]]에서 비슷한 의석을 점하고 아일랜드 자치를 주장하는 아일랜드 의회당(Irish Parliamentary Party)이 약간의 의석을 가져 캐스팅 보터가 되었다. 그리고 자유당이 아일랜드 의회당과 연립 정부를 꾸리면서 자유당 정부가 1911년에 아일랜드 자치 법안을 하원에 상정했다. 이 때에도 격렬한 논쟁이 일어 아일랜드 자치 법안은 하원에서 가결되었지만 보수당이 다수인 [[영국 상원|상원]]에서 거부되기를 3번이나 반복했다. 결국 하원에서 상원의 거부권을 무력화하고[* 1911년에 통과된 의회법에 따라 하원은 제한적인 상황에서 상원의 거부권을 무력화하고 바로 국왕의 재가로 넘길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국왕 [[조지 5세]]에게 법안을 넘겼다. 그러나 이 법안이 결국 의회를 통과하자 [[얼스터]]에서는 난리가 나서 얼스터 연합주의자(친영 진영)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가 민병대를 구성해 폭력 사태를 벌이는 등 혼란에 빠졌고 결국 [[조지 5세]]는 법안 재가를 연기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영국 의회]]는 자치 법안을 보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조지 5세]]가 이 법안을 아일랜드 자치 법안과 함께 재가하여 아일랜드 자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로 미뤄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